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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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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평도호부 청사 사진
    <부평도호부 청사>
  • 한준 - 신도비 사진
    <한준 - 신도비>
  • 변종인 - 문인석 사진
    <변종인 - 문인석>
  • 한언 - 중국식문인석 사진
    <한언 - 중국식문인석>
  • 1392년 이성계에 의해 건국된 조선은 지방의 통치를 체계적으로 정비하기 위해 전국을 8도로 나누고, 그 밑에 부·목·도호부·군·현 등을 두어 각기 지방관을 파견하였다. 이때 부평은 전국 44개 도호부 중 하나로 종3품인 도호부사가 파견되었다. 당시 부평은 강화와 김포를 거쳐 한성 및 해주와 연결되는 한강 수로에 위치였기 때문에 행정구역상 수원진관에 소속되어 인천을 속읍으로 둔 군사적 요충지였다.
  • 1592년(선조 25)부터 7년간 계속된 임진왜란으로 조선은 전체 지역에 막심한 피해를 입었다. 당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왜군의 제1군은 평안도 방면으로 북상하는 과정에서 5월 19일 부천의 원미산 장대봉에서 항거하는 선거이(宣居怡) 장군을 물리치고, 그날로 부평읍에 침입하여 계양산성을 근거지로 삼았다. 당시 부평부사 남유(南瑜)는 겁에 질려 싸우지도 않고 도망쳐 피신하였다. 계양산성을 근거지로 한 왜군은 인천을 함락시킨 후 김포와 통진을 거쳐 개성으로 진격하였다.
  • 조선시대 부평은 조운 수로의 길목으로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특히, 삼남 지방에서 올라오는 조운선들은 인천과 부평 연안을 지나 강화도염하 수로를 거쳐 한강의 마포나루에서 하역하였다. 그러나 강화도 염하 수로는 물살이 거세어 이곳에서 조운선들이 좌초되는 사고가 자주 발생하였다. 이에 따라 인천 연안에서 한강으로 직접 연결되는 물길을 내서 조운선을 운행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이는 자연 하천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인공으로 수로를 내어 물길을 바꾸려는 것이었다.
  • 이 시도는 조선 중종 때 김안로에 의해서 추진되었는데, 인천 연안에서 인천과 부평의 경계인 원통이고개와 부천을 지나 한강으로 연결시키려는 것이었다. 당시 공사는 한강에서 시작하여 원통이고개까지 수로를 굴착하고 중단되었다. 당시의 기술력으로는 이 고개를 굴착하기 힘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 1876년 조선은 일본과 조일수호조규(일명 강화도 조약)를 체결하면서 마침내 개항을 결정하였다. 1883년 인천이 개항됨에 따라 부천은 많은 변화가 있었다. 1895년(고종 32) 갑오개혁의 일환으로 종래의 8도를 폐지하고 13부제를 시행하면서 부평은 인천관찰부에 속한 부평군이 되었다. 그러나 1896년 13도제로 전환함에 따라 경기도에 속한 부평군이되었다. 당시 부평군은 15개 면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 가운데 현재의 부천에 해당하는 곳은 상오정면·하오정면·석천면·주화곶면·옥산면의 일부 지역이었다
  • 개항 이후 인천항을 통해 들어온 많은 외국인들과 교역품들이 서울로 향하면서 그 길목에 해당하는 부천에도 변화의 기운이 움트기 시작하였다. 특히, 1899년 노량진과 제물포를 잇는 경인철도가 개통되어 부천에 소사역[지금의 부천역]이 설치되면서 현재의 부천이 형성되는 기틀이 마련되었다. 소사역은 광활한 김포평야에서 산출되는 농산물을 모아 인천항을 통해 일본으로 수출하기 위한 목적에서 설치되었다. 개통 당시의 소사역사는 목조 건물이었으며, 매우 협소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 소사역이 설치됨에 따라 인근 마을의 주민들이 이주해서 여객을 상대로 한 접객업소와 음식점 등이 생겨났으며, 성주산 서쪽 기슭으로는 가로촌(街路村) 형태의 취락이 발달하였다. 그 후 1908년경 이곳에 일본인들에 의한 복숭아 과수원이 생겨나면서 경작을 위한 노동력이 필요하게 됨에 따라 인근 주민들이 급격히 이주하여 취락의 발달이 촉진되었다.

최종수정일 : 2022-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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